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한제국 황실 복원론 (문단 편집) === 황족의 모범 사례 결여 문제 === 왕정국가의 경우 왕가가 솔선수범해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보여야 하는 의무가 주어진다. 그래야 왕위에 대한 정통성이 지켜진다. 왕가는 한 국가의 얼굴이고 전체적으로 국민의 지지가 있어야 유지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일례로 [[영국 왕실]]은 1965년에 영국에서 [[징병제]]가 폐지된 후에도 지금까지 자원해서 군복무[* 참고로 이렇게 군복무를 하는 왕가 일원들은 꽤 험하게 [[https://youtu.be/HgQHesoiZoc|굴려지는데]], 불만이라도 제기했다간 징징거린다는 인상으로 비춰지다 보니 정말 힘들어서 죽겠는 상황 아니면 크게 불만을 제기하지 못한다고.]를 수행했으며, 이들 상당수가 업무 강도가 높은 군 부대로 간다. 남자들 뿐 아니라 전 [[영국 국왕|국왕]]인 [[엘리자베스 2세]]도 [[공주]] 시절 비록 여성이 총을 드는 게 금기시된 당대 특성상 전장에 직접적인 참전은 못했지만 [[영국 공군]] 보급 중위 신분으로 손수 [[운전병|운전을 하며]] [[제2차 세계대전]] 중에 군에 복무했다. 엘리자베스 2세의 아버지 [[조지 6세]] 국왕과 어머니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왕비는 [[영국 본토 항공전|영국 본토가 공습 받는 상황]]에서도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지 않고 궁을 지켰고, 부부가 함께 폭격받은 도심을 끊임없이 돌아다니며 국민들을 위문했다. 이후 [[찰스 3세]] 역시 [[영국 해군]] 장교로 복무하며 해군 [[원수(계급)|원수]] 계급을 가지고 있었고 [[앤드루 왕자]]와 [[헨리 찰스 앨버트 데이비드|해리 왕자]]도 [[앤드루 왕자#s-5.1|사생활]]과는 별개로 헬기 조종사가 되어[* 앤드루 왕자는 영국 해군의 [[SH-3]] 헬리콥터를 조종했고 해리 왕자는 영국 육군의 [[AH-64]] 헬리콥터를 조종했다.] 포클랜드 전쟁과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참전해[* 특히 해리 왕자는 "실전에 배치되지 않는다면 훈련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하면서 자신의 아프가니스탄 참전 의사를 명백하게 밝힌 적이 있고[[https://www.hankyung.com/international/article/2012020951768|#]] 참전 중 탈레반을 25명 사살했다고 한다.[[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230109015011|#]]] 왕족의 의무를 철저하게 이행했다는 건 영국인들도 인정하는 사실이다. 한국은 거의 모든 남성이 군복무를 하는 [[징병제]] 국가라서 잘 느껴지지 않는 부분이지만 영국은 [[모병제]] 국가임에도 왕실 일원들은 모두가 군복무를 하는 게 기본이다. 영국 왕실은 영국인들에게는 결코 의무가 아닌 군복무를 함으로써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고 있다. 하지만 조선왕조의 구성원들은 그러지 않았다. 조선 말기에 왕족들은 여러가지 잘못을 저지르다가 급기야 [[친일반민족행위자]]에 '가까운'이 아니라 그냥 친일반민족행위자 그 자체가 되기에 이르렀다. 조선이 망한 이후 조선의 황실은 이왕가란 이름으로 일본 [[왕공족]]에 편입되어 일본 왕족과 맞먹는 수준의 대접을 받았다. 황실 재산인 [[내탕금]]도 그대로 인정받아서 일본 내의 다른 귀족들보다도 더 부유한 경우도 있었다. 오죽하면 [[영친왕]]이 [[이방자]] 여사와 결혼했을 때, 이방자 여사의 친정을 다른 방계 황족·[[화족]] 가문들이 부러워했을까.[* 이 사건을 가지고 1920년 5월 8일자 독립신문은 독립운동가들의 의지를 배신하고 일본 여자와 결혼한 영친왕은 부모도 없고 나라도 없는 [[인간쓰레기]]이기 때문에 이제부터 영친왕이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고 500년동안 죄악을 저지른 조선 왕조는 앞으로 영원히 단죄와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분노를 쏟아냈다.[[https://search.i815.or.kr/contents/newsPaper/detail.do?isTotalSearch=Y&newsPaperId=DR192005080101&sortNo=8|#]]] 국민들이 탄압 받을 때 이들은 오히려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겼다.[* 이런 한심한 꼴은 [[유림]]들의 저항의지를 감소시키거나 황실에 등을 돌리는 계기가 되었다. 그 결과가 1919년 고종의 사망 때 유림들간에 벌어진 복제 논쟁인데 논쟁에서 유림들은 고종에 대한 [[상복]]을 입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를 놓고 논쟁을 벌였다. 복제라고 했지만 실질적으로 고종을 황제으로 인정하느냐 마느냐였다. 반대측들은 망국의 군주면 마땅히 그에 대한 책임을 느끼고 죽어야 하는데 죽지않고 살아서 호사를 누렸다. 그런 군주를 위해 상복을 입어야 하냐 우리는 대한제국 황제의 유림이지 언제 일본 이태왕의 유림이었나? 등의 논리로 반대했다가 고종 독살설이 돌자 '고종 독살설=고종은 일본에 반대했다=고종은 반일'라는 결과가 도출되어 유림들은 고종을 위해 절하기로 합의했다. 유림은 그래도 구시대에 대한 수호 의지가 강력하고 고종은 한때 자신들의 군주였음에도 독살설이 돌고서야 고종을 왕으로 인정하기로 합의할 정도로 인식이 나빴으니 황실은 더 말할것도 없다.] 또한 [[유럽]]을 비롯한 해외유람을 다니며 호의호식을 누렸다. 차라리 극심한 탄압을 당해서 빈곤에 찌들어 살고 입에 풀칠하기조차 어려웠다면야 동정표라도 불러서,[* 이러면 적극적인 항일에 나서지 않은 것도 이해받을 수 있다. 오늘 밥벌이도 어려운 사람들에게 항일이니 뭐니 하는걸 강요할 순 없는 노릇이니. 망국에 대한 죄도 어떻게 보면 극심한 탄압을 다한 것으로 갚았다고 여겨질 수도 있고.] 조금은 호의적인 감정이 생겼을지 모르지만 실상은 [[그놈이 그놈]]인 실정이니 도저히 [[답이 없다|답이 없는 것이다.]] 실제로 [[고종황제]]의 친형 [[흥친왕|이재면]], [[영선군|이준용]], 황실 친족 [[이지용]], [[이재극]], [[청풍군(1890)|이해승]], [[창산군|이해창]] 등을 비롯해 [[여흥 민씨]]와 [[해평 윤씨]] 등의 세도가는 [[경술국치]] 이후, 총독부로부터 주는 귀족 작위를 받아가며 평생을 떵떵거리고 살았다. 불행한 삶을 살았다며 동정받는 [[덕혜옹주]]의 삶도 사실 매우 유복했다. 오늘날 현재에도, 황실 친족(이해승, 이재극 등), 척족 세도가문[* 대표적으로 [[여흥 민씨]] 집안. 단 이쪽은 친일파도 많았지만 [[독립운동가]]도 많았다는 게 특징. 그나마 이것도 민씨 집안만 그랬고, 하다못해 [[김가진]]처럼 처음에는 친일파였을지 몰라도(그것도 그냥 친일파가 아닌 [[조선귀족]]이었다.) 나중에는 [[독립운동가]]로 전향했다면 모를까 그것도 아니면...] 후손들은 [[철면피|선조들의 이런 행위에 대해 반성하지 않았다.]] 오히려 선조들의 재산을 되찾겠다면서 소송을 거는 중이다.[* 2010년 12월에 황실 친족 친일매국 [[청풍군|이해승]]의 재산을 되찾겠다는 후손의 소송이 승소해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2006년 9월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이우]]의 조부 [[흥친왕|이재면]]과 부친 [[영선군|이준용]]의 행적을 친일행위로 규정해 발표하자, 이우의 아들 [[이청]]은 2006년 11월 "헌법상 보장된 인격권 등 기본권을 침해당했다"며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했고, 2007년 1월 18일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결정을 취소해 달라며 [[서울행정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하지만 헌법소원은 2009년 10월 5일 [[헌법재판소]]에서 각하되었다. 하지만 이는 억울할만 한 게, [[이우]]의 친부는 [[독립운동가]]였던 [[의친왕]]이었으며, 이우 역시 일본 제국주의에 부정적인 입장의 인물이었다. 다른 황실 일원들과 비교하면 목소리 낼 자격은 있던 셈.] [[http://www.ejanews.co.kr/sub_read.html?uid=49171|#]][* 웃긴 게, 그 근거로 내세우고 있는 것이 구 [[일본 제국]] [[조선총독부]]의 기록을 근거로 들이내밀었다는 사실이다.[[http://media.daum.net/society/others/newsview?newsid=20120921212309886|#]]] 차라리 황족들이 [[일본 제국]]의 호의를 받아들이는 척 유럽을 여행하면서 몰래 독립 운동 비슷한 것이라도 했으면 [[독립유공자]] 대우를 확실히 받아 왕정복고에도 꽤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힘이 없어서 도와달라고 요청한 건 죄가 아니기 때문이다.[* 의친왕이 상하이 임시 정부 망명에 실패하고 나서 8년 후인 1927년에 영친왕이 유럽 여행을 다니고 있을 때 어떤 독립운동가가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전하께서 유럽 여행을 다니시며 각국 정치인들과 친하게 지내려고 노력하시는 것은 칭찬드려야겠지만 유럽에 살고 있는 조선인들은 전하가 신문 기자들에게 나는 일본 황족이 아니라 조선의 황태자라고 시원하게 말해주는 것을 기대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전하를 일제의 감시에서 빼내어 상하이나 노령으로 모셔드릴 계획까지 있는데 전하께서 일본 군인을 앞에 세우고 다니며 유럽 여행만 즐기고 계시니 어찌 한심하지 않겠사옵니까. 라는 편지를 보낼 정도였다. 출처:마지막 황태자, 송우혜, 푸른역사 물론 의친왕 같은 사례를 겪은 일본 입장에선 영친왕이 독립운동의 독자라도 입에 담았다간 게거품을 물테니 소신있게 나서긴 힘들 판이긴 했다.] 당시 이승만이 주석으로 있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된 방침도 열강들의 도움을 받아 독립하자는 외교독립론이라 욕하기도 뭣하다. 1920년대라면 일본의 가혹한 식민지 수탈 때문에 일본의 입지가 워낙 높아져 있었고 반대로 조선은 독립하더라도 앞날이 캄캄한 상태가 국제사회의 인정을 받기는 힘들었을지는 몰라도 적어도 한국인들 사이에선 평판이 더 올랐을 것이며, 게다가 사실 20세기 초중반만 하더라도 전세계적으로 군주정은 무슨 환상이 아니라 생생한 정치 체제였던지라, 아무리 멸망한 식민지 왕족이라도 군주들에 대한 선망이나 존중은 어느정도 남이있는 분위기였다. 당장 [[이승만]]이 자신을 '프린스 리'라고 칭하며 현지 엘리트와 교류했던 걸 생각하자. 그리고 [[김구]], [[김규식]] 역시 [[중화민국|중국]]의 [[장제스]] 등과 같이 [[한국-대만 관계|협력]]한 것을 생각해봐도 이들에게는 외국에 독립운동의 목적을 알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었다.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인도 제국|영국령 인도제국]] 같은 식민정복 이전 독자적 정치적 전통이 깊었던 나라들의 망국 군주들은 직접적인 반란에 연루되지 않는한 의전상의 특권이나 명예는 식민 당국도 존중하는 편이었고,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에서 패전하고 쫓겨나온 망국의 군주 [[하일레 셀라시에]]가 국제연맹에서 이탈리아의 침략을 성토하며 한 연설은 당장의 실이득은 못봐도 세계 정가에서 큰 인상을 남기며 [[파시즘]]에 대한 중요한 경고가 되었다.[* 반대로 이런 [[셀라시에]]에게 깜둥이 드립치며 모욕했던 이탈리아 대표는 현장에서 루마니아 대사에게 야만인 소리를 들으며 스위스 경찰에게는 국가원수 모독죄로 잡혀갔다. 물론 다음날 석방되기는 했지만...] 하지만 조선 황족들은 대부분 그 간단한 특권과 연줄을 이용한 최소한의 독립 호소조차 하지 않고 일제에게 혹사당하는 조선 백성들을 외면한 채, 그저 일제가 자신들에게 제공해주는 온갖 특혜와 사치의 달콤함만을 즐기는데 열중했다. 단, 한가지 알아야 할 것은 [[영친왕]]과 [[이우]]는 일본의 정치적인 의도로 인해 볼모가 되어 억지로 끌려간 측면이 있고 일제의 강요로 한 행위를 넘어 적극적인 친일을 하지는 않았으므로 매국노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하지만 대다수의 왕족들은 일본의 회유책인 사치에 안주하는 모습을 보였다. 해방 이후 실권을 잡은 [[이승만]]이 옛 황실 일족을 아예 한국 땅에 발도 못 붙이게 입국을 금지시키고 황실 자체를 폐문시켜버린 것에 대해 당시 [[독립운동가]]들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던 것[* 이미 [[복벽주의]] 독립운동가는 1910년대 이후 전멸에 가깝게 사라지고 없었다. 그나마 이들이 할 수 있던건 독립 이후 황실에 대한 특별대우를 보장해 줄 것 뿐이었지 황실복원은 아니었다.][* 만일 [[김구]]나 당시 정치적 스탠스를 고려해도 상대적으로 [[자유보수주의|리버럴한]] [[김규식]]과 같은 인물이 [[대통령 중심제]] 하의 [[대통령]]이나 [[의원내각제]] 하의 [[국무총리]]가 되었어도 옛 황실 일족에 대한 우대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들 입장에서는 떠받들어야 할 상전이 아니라 [[일본 제국]]의 돈을 받고 호의호식한 자들로 밖에 안 보였을 것이다. 실제로 [[이승만]]의 경우도 그렇지만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 소속 인물들은 [[중화민국|중국 대륙]]에서 고생이라는 고생을 하고, [[김규식]]처럼 교수라는 부업까지 해도 녹록치 않았다. [[하와이]]나 [[북미]]에 있던 한인들도 허드렛일을 하면서 독립운동자금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송금하였고, [[중앙아시아]]나 [[러시아]]의 [[고려인]]들은 [[제노사이드]]의 피해까지 입게 되었다.]만 봐도, 당시 한국의 국민 및 독립운동가들에게 황족들은 전부 사라져주는 게 좋은 사람들이었다. 그나마 [[박정희]]가 집권하자마자 황실 일족에 대한 탄압을 중단하면서 일본에 있던 일부 한국 황족들이 귀국할 수 있었다. 또한 [[박정희 정부]]에서 옛 황실 일가의 생계에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재정적 지원을 해주는 등 구 황실에 대해 어느 정도 우대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전두환]] 집권 이후에는 구 황실에 대한 우대를 중단하면서, 구 황실 일족들은 완전히 몰락하여 경제적 하층민으로 전락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전두환은 예우만 중단한 것이 아니라 "구 황족이고 뭐고 왜 국가 문화재에 불법 거주하고 있냐?"며 그들을 전부 궁에서 퇴거시키는 식으로 탄압했기 때문에, 박정희의 허가로 귀국한 구 황족 인사들 중 일부는 이러한 탄압을 못 이겨 해외로 망명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궁(드라마)|드라마 궁]]의 경우도 황실 복원은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던 황족이 국민적인 지지를 얻어 추대되었기에 가능한 일로 설정되어 있고 [[마이 프린세스]]에서는 비밀리에 독립운동의 스폰서를 하려다가 중간에 [[먹튀]]한 인간이 있었다는 설정으로 변호를 해줬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황실이 독립운동에 큰 공을 세웠다는 식으로 설명한 것인데 그만큼 현 황실이 복원되려면 최소한 그정도의 공적은 있었어야 국민들도 납득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드라마라는게 일반 대중들이 보는것인 만큼 그들의 정서에 맞춰줘야 하기 때문에 드라마는 국민들의 정서를 반영할 수 밖에 없다. 항일 투쟁을 적극적으로 벌이던 보수 유림이 고종의 죽음을 계기로 항일 투쟁을 포기해 나갔던 것도 이와 연관이 있다. [[유교]]적 신분질서와 군신대의와 같은 유교적 명분으로 투쟁에 임했건만, 정작 유교적 가치의 핵심이자 명분으로 삼아야 할 황족들이 일본 [[왕공족]]에 흡수되어 잘먹고 잘살았으니까. 물론 예외도 있다. '''[[의친왕]] 이강'''은 그래도 조국을 되찾겠다며 황족으로의 예우를 포기하고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건너가려고 한 적이 있다. 비록 실패했지만. 만일 이 [[망명]]이 성공했더라면, [[궁(드라마)|궁]]에서 그려진 모습이 현실화되었을 수도 있다.[*반론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독립운동가 간의 갈등이 심했는데 의친왕을 중심으로 한 황족이 임시정부에 있었다면 전제군주제를 채택할지 입헌군주제를 채택할지를 두고 다퉜을 것이고 공화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도 끼어들면서 불난 집에 기름 붓는 꼴이 되었을 것이고 임시정부는 끝없는 갈등 속에서 사분오열했을 것이라는 의견이 있다. 실제로 임시정부에서 의친왕을 들이기로 결정했을 때 가장 걱정한 부분이 이 부분이기도 했다.] 그런데 반대로 생각해 보면, 그 많은 황족들 중에 그나마 독립운동에 가까운 활동을 한 사람이 [[의친왕]] 한 명 뿐인 것에서 당시 왕공족들이 얼마나 일제에 순응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흔히 의친왕이 망명시도 빼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걸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실제로는 억류 이전까지 [[손병희]]를 위시한 천도교 단체와, 신한혁명당, 군무도독부 같은 독립운동 단체와 활발히 교류하고, 그들에게 자금을 지원해 오고 있었다. 또한 [[대한독립선언서|독립선언서]]에 서명을 하기도 했으며, 3.1운동의 구상이 시작된 [[봉황각]]의 부지를 매입한것도 의친왕과 손병희였다. 당시 일제도 의친왕이 은밀하게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있음을 눈치채고 있었기에 의친왕의 거처인 사동궁을 계속 감시하고 있었다. 이정도면 감시당하고 있는 왕공족의 입장에서는 꽤나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가담한 편이었다.] 그러나 망명 실패 이후 조선에 억류되어 공(公)의 지위와 친왕으로서의 특혜를 박탈당하고, 전보다 더 삼엄해진 감시를 받게되자 독립운동 단체의 후원과 교류마저 막히면서 그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이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황족의 삶을 누리는 걸 거부하거나 [[창씨개명]]을 거부하는 등, 소극적 저항 밖에 할 수 없었다. 이렇게 의친왕이 당시에 독립운동에 호의적이었던 이유가 "[[전주 이씨|우리 집안]]은 남달리 조선 500년 동안의 주인으로 서온 집안으로서 그 이외의 조선인은 하인 또는 손발과 같은 관계인데, 그 하인·손발인 2천만 사람들이 주인을 생각하여 조선독립을 위해 소요하고 있음에 그 주인이 모르는 체하고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고종이 독살되었다고 생각하여 일제를 아버지의 원수라고 생각하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https://db.history.go.kr/item/compareViewer.do?levelId=hd_006_0010_0280|#]] [* 의친왕이 상해 임시정부에 보냈다는 편지는 의친왕이 직접 쓴 게 아니라 대동단의 전협이 의친왕의 이름을 빌려서 대신 썼다는 이유로 [* 출처:대동단실기 148~149p, 신복룡, 도서출판 선인] 진정성을 의심받기도 하나, 애초에 망명 전후 행적에서 의친왕은 친 독립운동에 가까운 움직임을 보였고, 대동단이 복벽주의와는 거리가 먼 사회주의를 강령으로 삼은 단체[*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5979|3대 강령]]]였음에도 의친왕이 적극 협조했다는 점에서 독립운동에 대해 진정성이 없었다고 볼 수는 없다.] 이씨 집안을 주인, 백성을 [[하인]]으로 칭한 것은 나라를 다스리던 집안의 사람으로서 백성들에게 부응해야 하는 의무감을 느낀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으며 상하이 임시정부에 보낸 편지에서 독립된 대한의 평민이 될지언정 병탄시킨 일본의 황족이 되지 아니하리라고 쓴 것으로 볼 때 복벽주의자들에게 옹립될 뻔한 것과는 별개로 스스로 황제가 될 생각은 없었다고 보여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시대적 전제주의 사고방식을 완전히 버리지 못한 부분은 아쉽게 느껴질만 하다.[* 의친왕은 미국의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교]]에서 유학을 한 경험이 있기에, 다른 황족에 비해서 민주국가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을 수 있다.] 그 일제에 비협조적이고 독립운동에 호의적이었다는 의친왕의 발언과 여러 활동에도 불구하고 황실에 대한 독립운동가들의 반응은 영 좋지 않은 경우가 많았는데,[* 일례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대동단의 도움을 받은 의친왕의 망명이 실패하자 1920년 1월 8일자 독립신문에서 '''임시정부는 이미 대통령과 국무총리와 국무총장이 있는데 의친왕에게 줄 자리가 어디 있냐'''며, 황족이나 귀족이 오는 것을 막지는 않겠지만 특별대우는 절대로 해 주지 않을 것이고, 의친왕과 복벽주의자들이 임시정부에 오는 것도 '''너희 조선 왕족과 복벽주의자들이 독립운동을 미끼로 민심과 권력을 얻으러 임시 정부에 기어들어오려고 하는 더러운 속셈을 누가 모를 것 같았냐면서 가증스럽고 교활한 적'''이라고 깠다.[[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heinrich&no=3583&s_type=search_name&s_keyword=.EC.97.89.EB.B6.80.EC.9D.B4&page=1|#]]] 그를 제외한 나머지 황족들은 그런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친일파거나 희생양이거나. 독립운동가들 입장에선 의친왕만 '별난 황족' 일뿐 나머지 황족들은 일제에 빌붙어 호의호식하는 자들 뿐이었기 때문에 대한제국 황족들을 신용할래야 신용할 수가 없었다. 그나마 의친왕의 둘째 아들인 [[이우]]의 경우 독립운동설은 근거가 없긴 하지만 그래도 민족의식이 강했던 점+30대의 젊은 나이와 [[예쁘면 모든 게 용서된다|수려한 외모 등으로 황실복원 여론을 끌어모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으나 광복 직전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히로시마에서 원자폭탄에 피폭되어]] 사망하고 말았다. 즉, 하다못해 의친왕이 억류된 상황에서 다른 황족이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의지를 보였다면, 복벽주의 세력이 명맥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었겠지만 아무도 그 의지를 뒤따르지 않았다. 흥친왕, 영선군, 이건 등 다른 왕공족들은 일제가 준 지위에 안주하며 부귀를 누렸고, 볼모였던 영친왕은 망국에 한탄하며 무기력해 했을 뿐 적극적인 행동은 시도하지 못했다. 결국 이런 상황에서 1919년에 벌어진 고종의 죽음, 3.1운동, 의친왕 망명이 실패하자, 구심점이 사라진 복벽주의 세력은 1920년대가 되면서 모두 몰락해 사라질 수 밖에 없었다.[* 1920년대에 죽은 순종의 경우엔 애초부터 허수아비 황제에다가 모자란 사람이란 이미지가 강해서 그를 구심점으로 삼는 사람은 전무했다.] 왕공족의 삶을 거부하기는 커녕, 철저히 일제강점기에 순응하고 편안한 삶을 누리는 길을 선택한 시점에서 황실 복원의 이야기는 물 건너 간 것이다. 이런 대한제국 황실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면도 있는 사례가 [[베트남]]의 [[응우옌 왕조]]인데, 응우옌 왕조도 [[프랑스|외세]]에게 굴복해 식민지가 되었다는 점이 같지만, 조선은 아예 멸망하고 조선의 왕족은 왕공족이라는 지위로 변한 반면, 응우옌 왕조는 프랑스의 보호국이 된 채 형식적으로는 남아 있었다. 당연히 응우옌 왕조의 황제도 남아 있었는데, 응우옌 왕조의 4대 황제인 [[사덕제]] 시기부터 프랑스의 식민지가 된 이래 [[바오다이 황제]]에 이르기까지 프랑스의 식민지배를 겪었지만, 응우옌 왕조는 대한제국 황실과는 달리 프랑스에 대해 적극적인 저항을 펼친 황제가 3명이나 나왔다. 이들의 사례를 보면 이렇다. * 첫번째는 출제 [[함의제]]로, 당시 실권자인 똔텃투옛의 보조를 받아 궁을 나가 반프랑스 독립운동을 주도했다. 이 기간이 3년. 저항은 실패로 돌아가고 본인은 붙잡혀 [[프랑스령 알제리]]로 유배당했고 다시는 베트남에 돌아오지 못한 채 1943년 사망했다. * 2번째는 폐제 [[성태제]]로, 겉으로는 프랑스의 지배에 순응하는 척 했지만 뒤로는 독립운동을 시도했다. 이쪽도 결국 실패하고 프랑스령 [[레위니옹]] 섬에 유배되었다. 그래도 [[제2차 세계 대전]] 끝난 후까지 살아 있었기에 이쪽은 다시 고국에 돌아올 수 있었다. 1954년 사망했다. * 3번째는 폐제 [[유신제]]로[* 위에 나온 성태제의 '''아들'''] 프랑스의 지배에 불만을 품고 베트남 광복회와 함께 봉기를 일으켜 독립을 시도했지만 실패, 아버지처럼 레위니옹으로 유배되었고[* 사실 폐위 안 되고 끝날 수 있었는데 프랑스의 꼭두각시가 되기 싫다며 폐위를 택했다.] 유배 후에는 가족들과 함께 프랑스의 어떤 대우도 거절하고 라디오 수리, 법률학교에 등교해 외국어 공부, 신문사 창간 등의 일을 하다가 2차대전이 터지자 [[비시 프랑스]]의 레위니옹 통치에 반기를 들고 [[자유 프랑스]] 군에서 싸웠다. 이쪽은 아버지와는 달리 끝은 안 좋아서 응우옌 왕조가 [[베트민]]에게 멸망한 후 프랑스의 [[드골]]과 응우옌 왕조의 부활을 논의하려고 떠났다가 비행기가 추락해 사망했다.[* 여기에는 베트민의 암살이라는 설이 돈다.] 여기까지 보면 알겠지만 보호국이라고는 하나 한 나라의 국가원수였던 3명이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나섰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 넣지 않았지만 [[계정제]] 역시도 소극적으로나마 프랑스에 저항했다.] 그리고 이 대가인지 [[응우옌 왕조]]는 베트남에서 평가가 좋지 않음에도[* 건국 후 100년도 안 가 프랑스의 [[식민지]]가 된데다가, 건국 시초부터 베트남에서 영웅으로 추앙받는 [[응우옌반후에]]의 [[떠이선 왕조]]를 무너뜨린 것이고, 창건자인 [[응우옌푹아인]]은 이걸 위해서 [[태국|시암]], [[청나라]], 프랑스 등에 손을 내밀기도 했으며, 특히 프랑스와 협력한 것이 뒷날 식민지배의 단초를 제공했다. 결정적으로 통치도 시원찮아서 베트남인들에게는 없는 사람 취급이다.] 출제 [[함의제]]는 다른 응우옌 왕조의 후손들이 베트남 입국이 금지된 와중에도 독립운동의 공적을 평가받아 그의 후손들은 입국하여 프랑스와 싸워보기라도 했고, 3년 동안이나 저항한 점이 높이 평가되어 [[명군]]으로 평가받는다. 폐제 [[유신제]]의 경우에도 평이 높으며 베트남 각지에 그의 이름을[* 정확히는 연호. 그가 재위했을 때 연호가 주이떤이고 이름은 푹호앙, 즉 응우옌푹호앙이다.] 딴 주이떤로가 있다. 또 그의 아들은 폐제 유신제 사후 미국에 묻혀있던 유해를 베트남으로 옮기기도 했다. 이상을 보면 알겠지만 베트남 응우옌 왕조는 조선과는 달리, 명과 암이 공존하기는 커녕 왕조 자체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가 좋지 않다. 그나마 대한민국의 보통 국민으로라도 대우받는 대한제국 황실과는 달리, 앞서 말한 몇몇 이들을 빼면 구 왕실의 일원들은 베트남 입국도 불가능하다. 하지만 저 왕조에서는 국가원수가 3명이나 나서서 독립운동을 주도했다. 하지만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황실복원 주장은 어림도 없다. 황제 3명이 나서서 독립운동을 주도한 응우옌 왕조도 현재 왕정복고는 말도 못 꺼내고 있는 실정인데, 대한제국 황실은 앞서 말한 것처럼 의친왕을 제외하면 일제에 저항한 황족이 거의 전무하다. 의친왕 이외에는 황제 시절에 [[의병]]활동을 지원하고 [[헤이그 특사사건]]을 벌이면서까지 어떻게든 일제에게 저항했으며, 황실 내탕금이 독립군에 지원하고 중국과 러시아로 여러차례 국외망명을 시도 했던 고종 정도이다.[* 이것조차도 고종의 의도가 아니라는 설도 있다.] 그나마도 앞의 두 사건은 상황이 막장인 건 맞지만 [[식민지]]까지는 아니라고 평가되던 시기의 일이다. 순종은 일본의 감시 아래 무기력했으며 그나마 다른 친일 왕족들과 달리 검소하게 살았고 그의 죽음이 이후 독립운동에 영향을 주긴 했다. 이렇게 의친왕[* 사실 의친왕도 황제가 아닌 일개 친왕에 불과해서 영향력이 약했고, 일제에 저항하긴 했지만 그마저도 실패했다.]을 제외한 대부분이 일제에 굴복했고 백성들을 외면한채 호화로운 생활을 누린 대한제국 황실이 자신들의 특권을 주장하는 건 말도 안 된다. 더욱이 황족으로서의 의무를 제대로 실현하지 못한 대한제국 황실이 보통 국민의 대우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황실 복원을 주장하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게다가 이 대우도 사실은 더 좋아진 것이다. 앞서 말했듯 [[이승만 정부]]는 해외에 있던 황실 일가의 한국 귀국을 금지했고, 한국 내에 있던 황실 일원들에게는 재산까지 몰수했다. 황실 일가가 한국에 귀국할 수 있게 된 건 [[박정희 정부]] 시절부터다. 이탈리아가 사보이아 왕가 일원을 쫓아내고 50년이나 지나서야 왕위 요구를 하지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고서야 귀국을 허가해준걸 감안하면 자비로운 처분.] 결론부터 논하자면 황족 스스로가 황실 복원의 길을 스스로 틀어막은 꼴이다. 일찍히 [[안중근]]이 1909년 10월 26일에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면서 외친 말이 무엇이었는지부터 생각해보자. 바로 "코레아 후라!"였다. 안중근은 어떻게든 한국이라는 나라를 알리기 위해 발악했던 것이다. 그러나 정작 조선 왕실은 일본 천황과 이토 히로부미의 부인에게 이토 공작이 하얼빈에서 [[안중근|흉악한 역적놈]]에게 화를 당하였다는 보고를 받고 놀랍고 통분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라는 전보[[https://sillok.history.go.kr/id/kzb_10210026_002|#]]를 보내고 토쿄 히비야 공원에서 열린 이토 히로부미의 국장식에는 이토 대사가 죽었다는 끔찍한 소식이 북쪽에서 들려오자 하늘의 태양마저 빛을 잃었다고 슬퍼하는 추모사를 보냈다.[[https://www.joongang.co.kr/article/210213|#]][* 이 추모사와 조의금 10만원을 들고 토쿄 히비야 공원에 갔던 박제빈과 민병석 등 조문 사절단은 분노한 현지 일본인들의 협박에 시달리다 장례식 후 도망가듯이 조선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그것도 모자라 이토 히로부미 대사님은 자신의 한 몸을 아랑곳하지 않고 일찍부터 우리나라에 왕래하면서 위태롭고 어려운 국면을 부지하고 수습하여 나갔으니, 그것은 전적으로 그의 큰 계책에 기인한 것이었다고 칭찬하면서 문충공이라는 시호를 내렸으며[[https://sillok.history.go.kr/id/kzb_10210028_001|#]] 이토 히로부미의 죽음을 애도하려고 왕실의 행정을 멈추고[[https://sillok.history.go.kr/id/kzb_10210028_008|#]] 수도 한성에서는 사흘 동안 음악과 노래를 금지시키라고 명령하고[[https://sillok.history.go.kr/id/kzb_10210028_008|#]] 장충단에서는 이토 히로부미의 죽음을 기리는 추도식을 열고[[https://sillok.history.go.kr/id/kzb_10211004_003|#]] 다른 황족들도 대부분 독립 노력은 커녕 호의호식만 했다.[* 다만 당시 대한제국은 거진 멸망한 상태로서 사법권조차 넘어간 허울뿐인 국가였다는 점을 잊어선 안된다. 국가체계는 사실성 허울뿐인 상태에서 대놓고 이토 히로부미가 죽었으니 잘 되었다며 쾌재를 부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